중경삼림, 왕가위 감독, 1994.
분명 별 다섯 개로 시작했는데
다 보고 나니 별 두 개 반.
오프닝 시퀀스에 뜨거워진 마음이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며 점점 식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엔 솔직히 조금 싸늘해졌다.
매일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지만
아마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언젠가는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내 이름은 하지무 경찰 넘버 223이다
(거기 서!)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친 이 순간
서로의 거리는 단 0.01cm였고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의 첫 대사로 완벽한 내레이션.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어느 물건이든 유통기한이 있다
꽁치도 유통기한이 있고
미트소스도 유통기한이 있고
랩조차도 유통기한이 있다
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유통기한이 없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지무 씨의 유통기한에 대한 날카로운 고찰.
1994년 5월 1일에
한 여자가 '생일 축하해'라고 말해 주었다
난 그 말 때문에 이 여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만약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702호의 메시지에 심장을 부여잡는 지무 씨.
사랑의 유통기한이 만 년이었으면 좋겠다는, '만 년 동안 사랑해' 하지무 씨.
메이가 올까 가게 앞의 전화를 붙들고 있는 모습도,
새로운 사랑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자기가 아는 모든 여자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도,
- 벌써 자려고? 이렇게 일찍? 잠이 오냐? 온다고? 그래, 잘 자라
- 초등학교 4학년 때 짝꿍이었잖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난다고? 알겠어, 안녕
ㅋㅋㅋㅋㅋ
지금부터 시작해서 바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겠다는 것도
귀엽다... (푸하핫)
몸속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서 조깅을 하는 것도,
생일날 자길 찾는 사람이 없을 테니 삐삐를 버리고 가겠다고 다짐하고선 삐삐가 울리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도
귀엽다!
역시 마음에 들면 그냥 다 마음에 든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다 마음에 안 든다.
663이 물건이랑 대화하는 것과, (이렇게 대화를 하면서 집안이 온통 바뀌고 있는 걸 모른다고???)
페이가 663 집을 드나드는 건 정말 싸늘하게 바라보게 됐다.
분명 "미술관 옆 동물원"의 주거침입은 나도 낭만이라 생각했었는데
이 이야기에선... 내 마음이 싸늘해지더라...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대개는 그렇게 스쳐가는 게 끝이지만,
누군가와는 인연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들은 좋았다.
그리고 첫번째 이야기가 진행될 때 두번째 이야기에 등장할 인물들이 남으로 스쳐가는 장면들도 좋았다.
누군가와 아는 사이가 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사랑하게 되는 건 더더욱.
그걸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하면... 별 두 개 반은 너무 감정적인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