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현, 교군의 맛, 현대문학, 2012.
문학 속 인물
서태후(1835-1908) / 청나라 말기 황태후.
서태후라는 별칭이 괜히 붙었겠는가. 한 끼에 아흔 가지 요리를 늘어놓고 먹었다는 미식가 서태후가 교군의 지배자로 환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74)
문학 속 단어
교군은 하나의 왕국이다. ... 마당이 넓은 고택인 교군은 해방 전부터 가마꾼들이 가마를 세워놓고 밥을 먹거나 낮잠을 자던, 이를 테면 버스 종점과 같은 공간이었다. 오래전 근처에 유명한 도요지가 있어 깨지기 쉬운 그릇을 역이나 시장까지 조심조심 나르는 운반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부들과 인력거꾼들은 교군에서 일거리를 배당받았는데 기차역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 이곳이 쉼터가 된 이유는 여기가 조선시대부터 가마를 제작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랑하듯 대문 옆에 교군 轎軍 이라는 한자로 새긴 석축이 서 있다. 무성한 대나무가 석축을 감싸듯이 안고 있어 교군의 원래 뜻이 뭐든지 간에 그럴싸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석축을 제거할 수 없었다. 사실 나이가 지긋한 손님들이나 그 뜻을 알아챌 뿐이지 젊은 사람들은 고택을 근사하게 꾸며놓은 일식집으로 알았다. (68-69)
64
눈꺼풀이 축 처진 김이가 젓가락을 닭 날개에 들이댔지만 집을 수 없었다. 위치를 조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닭 날개는 날개라서 자꾸만 날아가려 했다. 정인이 혀를 찼다.
67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김이는 착지할 곳을 몰라 공중에서 헤매는 새처럼 울었다. 나이 들어 눈물 참는 기술은 놀랍게 진화했으나 내버리지 못한 눈물은 안에 갇혀 늘 질척거렸다. 버림받은 어린아이가 안에 들어 있는 한 철갑 무장은 필수였다.
75
매운맛을 즐길 수 있는 독한 결심이란 한 가지였다. 아버지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98
결별했던 모든 것은 사라진 게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 현재를 지켜보고 있었다.
113
이번에는 당당하려 했는데 다시 원점이다. 더는 못 버틸 것 같다.
140
배미란은 왜 가수를 하지? ... 나는 왜 가수를 하고 있나. 가수니까 가수인 거지. 그의 질문에 무수한 대답이 떠올랐다가 스르르 흩어져버렸다. 대답할 거리가 너무 많거나 아예 없거나.
166
거긴 정말 맛난 게 많아. 너무 많아서 지긋지긋했거든. 난 참 바보 같아. 천국이 지겹다고 지옥으로 달아난 바보가 바로 나야.
197
높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금지곡, 세상에는 허락된 노래만큼이나 금지곡이 흔했다. 사회가 금지시킨 짓만 하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은 금지된 노래와 구호를 유독 사랑했다.
212
그럼 좀 물러나 있어. ... 그런데 오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고기는 절대로 익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 냄비만 줄곧 보고 있으면 결코 끓지 않아. 음식들은 우리를 경계하고 몰래몰래 움직이지. 뭉근한 맛이란 우리의 시야 밖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김이도 정도껏 관망해. 계속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레 지쳐서 아무것도 못해.
222
속없이 사는 건지 아닌지는 겉만 봐서는 모르죠.
225
그런 거 상관없다. 법은 원래 우리 편이 아니잖니?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하는 거야. 시간이 우리 편이라 어느새 너는 컸고 ...
241
아버지는 평생 낮은 자이고 누군가의 등을 밟고 오를 가능성이 없지만 그 웃음, 그 관대한 웃음으로 날 선 세상을 둥글게 이겨내고 있었다. 웃음은 진정한 승리의 표상이다.
266
어린 날의 자신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여름의 그때 그 일만 아니라면 김이도 마땅히 이 교군에서 자라고 있겠지. 잘 먹고 잘 뛰며 구김살 없이 쑥쑥 자랐겠지. 생각해보면 돌이키고 싶은 게 너무 많다.
326
이거 세상이 왜 이러죠? 사람 목숨이 그렇게 간단한가요?
352
누가 뭐래도 어떤 사안의 옳고 그름은 시야를 멀리, 높이 두고 판단하는 거다.
354
김이는 자신을 응원하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호전적인 여러 가지 대응방식을 떠올렸으나 이내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감정 안에 들어가 김이는 웃었따. 둥근 웃음으로 세상을 비웃는다. 내가 웃으면 세상도 웃는다. 아버지의 웃음, 그 웃음에게 배운 대로 처신할 것이다. ... 검게 물든 세상의 견고한 이치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도 지지 않고 한다. 다만 할 뿐이다.
* 이덕은 (그리고 배택수와 상희) - 배미란 - 손김이로 이어지는 삼대 이야기.
크게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김이는 수박처럼 단단하지
2. 미란이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그 모양이야
3. 김이가 달린다
4. 덕은이의 검은 밥상
김이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1장을 읽을 때는 근래에 읽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소설 중에 가장 재밌다 생각했는데 2장부터는 좀 뻔한 느낌이 있다.
그래도 '맛'을 이렇게까지 생생하고 세부적으로 표현한 소설은 처음이라 새롭고 재밌었다. 그것만으로도 읽어볼 만 한 것 같다.
손 씨 캐릭터에 여지없이 눈물이 나는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