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문학 속 책
문고판 숫타니파타, 법구경, 현염사에서 나온 연와무늬 표지의 화엄경 강의, 열반경 강의. 그 책들을 지구 반대편의 독일까지 운반함으로써 가족들과 나의 운명이 안전해질 것 같은, 막연하고 미신적인 희망 같은 걸 품고 있었던 것 같다. (25)
문학 속 인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믿었던 그와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7)
43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에는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진심으로 화를 낼 때 당신의 눈은 커지지요. 숱 많은 눈썹들이 치켜올라가고, 솟눈썹과 입술이 떨리고, 숨을 몰아쉴 때마다 가슴이 벅차게 오르내리지요. 당신은 나에게서 펜을 돌려받은 뒤 수첩에 휘갈겨 썼지요.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 학부에서 주택 설계를 했을 때 내가 설정한 유저는 정용준의 "바벨" 속 마리와 "희랍어 시간"의 그녀였다. I'm so proud of t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