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루니, 노멀 피플(2018), 김희용 옮김, arte, 2020.
문학 속 문학
제인 오스틴, 엠마, 1815.
문학 속 영화
쉘부르의 우산, 자끄 드미 감독, 1964.
문학 속 장소
슈테판 대성당, 오스트리아 빈.
문학 속 용어
무종지문: 두 개 이상의 문장이나 독립된 절을 접속사 없이 연결한 것
문학 ↔ TV 시리즈
Normal People(노멀 피플), BBC Three, Hulu, 2020.
# Paul Mescal
* 작가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Marxist)라 칭한다고 한다.
음, 그렇지만 취업 전망이 불투명해.
알 게 뭐야? 경제는 어차피 엉망인데.
마치 그가 지금껏 채색된 무대배경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온 것이 진짜 풍경이라고 밝혀진 기분이다. 외국의 도시들은 진짜고, 유명한 예술품, 지하철 시스템, 그리고 베를린 장벽의 잔존물도 진짜다. 세상을 현실로 만드는 핵심은 돈이다. 돈에는 무언가 너무나 부도덕하고 섹시한 데가 있다.
네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네 마음속에 분명히 새겨둘 필요가 있어. 메리앤이 말했다. 사람들이 대학에 가고 영문학 학위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직접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도 죄책감 느끼면 안 돼. 너한테는 그럴 권리가 충분히 있으니까.
그것은 계급 분리를 보여주는 공연 문화였다. 문학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감정적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해서, 그들이 즐겨 읽은 소설 속에서 그들을 대신해 그 여행을 경험하는 사람들, 즉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맹목적인 숭배를 받았다. 설령 작가 자신이 좋은 사람이고 그의 책이 정말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라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책이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마케팅이 되고, 모든 작가가 어느 정도는 이 마케팅에 가담한다. 아마 이것이 문학계가 돈을 버는 방식일 터였다. 문학은, 이런 공개적인 낭독회에서 드러나듯, 무언가에 저항하는 형식으로는 발전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
* 이 사회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지만, 그래도 이 소설은 "메리앤과 코넬의 관계"에 대한 소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와도 이렇게 친밀하다고 느껴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고, 메리앤은 생각했다.
대부분의 경우 대화는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며, 그가 전에는 한 번도 신경 써서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을 표현하도록 유도한다. 그가 읽고 있는 소설, 그녀가 하고 있는 연구 조사, 그들이 살아가는 바로 그 순간의 역사, 그런 순간이 진행 중일 때 그것을 관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 머물고 싶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잖아. 네가 그러겠다고 했으면 나는 환영했을 거야. 나는 너한테 늘 그랬잖아.
그러게 말이야. 그럼 갈게. 잘 자.
우리가 함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삶을 그런 식으로 가정해보는 건 나한테 너무 어려워. 예를 들어서, 그럼 그때 내가 대학을 어디로 갔을지, 그랬으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그런 거 말이야.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수수께끼인 것 같아. 절대로 다른 사람을 진짜로 다 알 수는 없어.
안 그래. 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다들 그렇게 말해.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뭔데? ... 사람들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알기 쉬운 존재들이야.
그녀는 코넬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알기 쉬운 존재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녀에게 없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이 포함되지 않은 내면의 삶 말이다.
상관없다. 끝난 일이다. 최근 들어 메리앤은 캐릭클리 주변을 거닐며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한다. 도서관 위에 떠 있는 분필가루 같은 흰 구름, 긴 가로수길, 푸른 허공을 활 모양으로 가르는 테니스 공, 차창을 내려 음악 소리를 밖으로 흘려보내며 신호등 앞에서 속도를 줄이는 차들. 메리앤은 이곳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 어딘가 다른 먼 곳이 아닌, 바로 이곳, 이 장소에서 삶이 순조롭게 펼쳐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말이다.
코넬의 동기들은 모두 똑같은 악센트로 말하고 똑같은 크기의 맥북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닌다. 세미나에서 자신의 의견을 열정적으로 피력하고, 즉석 토론을 벌인다. 코넬은 무슨 수를 써도 그토록 솔직한 견해를 생각해내거나 피력할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압도적인 열등감을 느꼈다. ... 하지만 그는 점차 모든 강의실에서 벌어지는 토론이 왜 그렇게 추상적이고 텍스트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가 부족한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들 자신이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려고 날마다 학교에 오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의 동기들이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데 거침없고 자신만만하다. 무지하거나 우쭐대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하지도 않다. 그들은 그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해치며 나아갈 뿐이고, 그는 아마도 그들을 진짜로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 또한 결코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어쩌면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몇 달 동안 고향 집을 떠나 생활해보니, 삶은 훨씬 더 커 보이고, 그의 개인적인 드라마는 덜 중요해 보인다.
때때로 메리앤이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한다. 그 영화는 내 기대에는 못 미쳐. 이렇게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님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는 옳고 그름에 대한 진정한 판단력은 조금도 기르지 않은 채, 섬세한 예술적 감수성만 간신히 키워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메리앤은 혼란스럽고, 갑작스럽게 예술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여기서 '그'는 당연히 코넬이 아니다. 루카스라는 인물이다.
그러다가 이따금 어떤 사람, 그러니까 버스 차장이나 거스름돈을 내주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메리앤은 잠시 충격을 받아, 이것이 사실은 그녀의 사람이고 그녀가 실제로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런 느낌은 그녀에게 배고픔과 목마름, 스웨덴어를 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수영을 하거나 춤을 추고 싶은 육체적 욕망 등 특정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갈망은 곧 다시 사라져버린다.
침대 위에서, 아니면 완전히 다른 어딘가에서 보내는 삶과 비교할 때, 여기서 보내는 삶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어디 있든 삶은 완벽하게 똑같아. 삶은 자기 머릿속에 담고 다니는 거니까.
물론 그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른 것들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 하는 행동들이 무의미해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의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깊은 슬픔이 보여주는 진리다.
... '코너 맥크레디'라는 필명으로 그 소설이 실린 부분을 펼쳤다. 본명처럼 들리지도 않잖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ㅋㅋㅋㅋㅋ
* 코넬이 좋은 내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