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김춘미 옮김, 비채, 2016.
📖 2023.10.
문학 속 장소
스톡홀름 공공 도서관(Stockholm Public Library), 스웨덴 스톡홀름.
숲의 화장터, Skogskyrkogården(스웨덴어로 '숲속 묘지'), 스웨덴 스톡홀름.
에릭 군나르 아스플룬드(Gunnar Asplund, 1885-1940) 설계.
예전에 '숲의 예배당'을 위한 스케치에 아스플룬드가 써넣은 말은 '오늘은 당신, 내일은 나'였다. '나'와 '당신'은 언제 바뀐 것일까?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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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는 좀더 뒤에 생각하자는 이구치 군 생각도 이해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은 토털 계획이 중요하지.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야. 물론 이구치 군도 그런 거야 알고 말한 거겠지만 말이야. 세부와 전체는 동시에 성립되어가는 거야.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반복해서 사람 모습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본 일이 있나?"
선생님 물음에 양서류 같은 태아 얼굴이 떠올랐다.
"생물 교과서에서 도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같은 것은 놀랄 만큼 빠른 단계에 완성돼. 태아는 그 손가락으로 뺨을 긁기도 하고 열었다 닫았다,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건축에서 세부라는 것은 태아의 손가락과 같다. 주종관계에서의 종이 아니야.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이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177
초등학교 쪽이 훨씬 역사가 오래됐으니까 교도소는 나중에 세워진 것이다. 요즘과 다르게 반대운동 같은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시대였다.
180
도서관이 조용한 것은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이 고독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면, 선생님은 그 공간을 어떤 형태로 만들려는 것일까.
202
"집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설계할 때 불이 잘 나지 않을 집, 지진에 무너지지 않을 집, 그런 것에 가능한 한 신경쓰지. 그것이 건축가에게는 중요하거든. 그렇지만 말이야, 만일에 도쿄 전체가 전부 불타버리는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내 집만 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건 좀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이 알 것 같으면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잠자코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주위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이쪽은 인명은 물론 가재도구도 전부 무사해.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야. 그런 사태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까? 마지막은 운을 하늘에 맡기고 천우신조 덕이라고 생각하면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철저하게 방재를 한 주택은 요새지, 주택이 아니야. 살기 편할지 어떨지 의심스러워. 요새에 산다는 건 늘 재난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과 같으니 말이지."
내 마음속에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남았다. 그렇지만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될지 몰라서 잠자코 있었다. 십대 때 목격한 간토 대지진 광경에서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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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씨는 가구는 정통적인 쪽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내 생각 따위는 없어.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어. 둘 다 할 수 있지. 나는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을 만들고 싶을 뿐이야."
286
고객이 있고, 기일이 있어. 건축가의 일이란 그런 거야.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
그런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라도 늘 시간은 봐둬야 하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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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렌보드를 부품별로 잘라가는 동안에 내가 선생님하고 함께 여름 별장에 온 의미가 겨우 분명해진 것같이 느껴진다. 어느 틈엔가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뒤집혔을 때 작업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그것이 확실하게 구원이 된다.
414
양손으로 끌어안듯이 아크릴 케이스를 살그머니 들어올려 옆에 두었다. 이렇게 정밀하고 견고한 모형은 전에도 후에도 본 일이 없다. 우치다 씨하고 나와 유키코가 별로 시간을 들이지 않고 이 모형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팔과 손목, 손바닥과 손가락의 연계가 이상적으로 안정되고(어떤 세밀한 작업에서도 손가락은 1밀리미터도 떨지 않았다.), 시력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0.1밀리미터의 틈새도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본인들은 그 사실에 아무런 자각이 없던, 틀림없는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선생님의 머릿속에만 있는 이상적인 손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소설에서 건축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그 진심이 느껴지니 덩달아 독자도 건축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 (실이니 이 소설을 읽고 건축가를 꿈꾸면 후에 현실을 마주했을 때 곤란해질 확률이 높다.)
나에게 이 소설의 핵심은 우리의 주인공 사카니시가 무라이를 존경했다는 점이다. 그에게 무라이는 회사 대표가 아니라 스승님이었다. 누군가가 걷는 길을 그대로 뒤따라 걷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을 품게 하는 '스승'이라는 존재. 소설 속에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그 강력한 설정이 소설 전체를 낭만적으로 만들어 준다.
* 참고로,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는 요시무라 준조(무라이의 모티브)이고, 자택 설계는 나카무라 요시후미(사카니시의 모티브)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리고 마쓰이에의 집에 놀러 간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 집에 반해 나카무라에게 자신의 집을 의뢰했다고.
* 사실 건축 이야기도 좋지만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도 재밌다. ㅎ
주인공 직장에는 또래 여자가 딱 두 명 있었는데, 한 명과는 연애하고 한 명과는 결혼했으니 그의 별장 생활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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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이 씨는 멈춰 서서 내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아무한테나 잘 대하면 안 돼."
"네?" 목구멍 속에서 소리가 되지 않는 작은 소리가 나왔다.
"알잖아?"
사사이 씨는 그렇게만 말하고 촛불을 끈 듯한 평온한 얼굴로 계단을 올라갔다.
(ㅎㅎㅎ)
* 그 후 2024년 겨울, 어느 휴양림에서.
비가 살짝씩 내렸고, 해가 지고 나니 정말 아무런 불빛도 없었다.
도시의 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야말로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K와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데, 갑자기 이 소설 속 주인공이 동료와 손을 잡고 걷던 게 생각이 났다.
딱 이런 어둠에서, 딱 이런 길을 걸었겠구나 싶었다.
소설에서는 그때 반딧불이가 나타났다고 재잘거렸는데 썩 K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