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콥젝,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 윤리와 승화, 김소연, 박제철, 정혁현 옮김, 2015.
자프루더가 본 것
1963년 11월 22일 미국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는 텍사스주 댈러스 시내에서 퍼레이드 중 암살당한다. 그 장면은 자신의 홈 무비를 위해 퍼레이드를 촬영 중이었던 에이브러햄 자프루더의 영상에 담기게 된다.
에세이 <롱 테이크에 관한 통찰>에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1922~1975)는 “몽타주” 편을 들며, 이 영화[케네디 암살 필름]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롱 테이크”라고 기술한다.
그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몽타주는 롱 테이크 영화제작 기법보다 뛰어나다. 왜냐하면 몽타주의 ‘컷’은 제작자가 자신이 모은 필름 조각들을 단순히 병치시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조율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이미지들을 배열할 하나의 시점―결과적으로 하나의 주관성―을 구성할 수단으로서 몽타주를 수긍한다.
하지만 자프루더의 롱 테이크 영화, 그 암살의 이미지는 사건의 유일한 필름으로서 다른 어떤 시점들과도 조율될 수 없다. 또한 파솔리니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조율이 없기에 필름 그 자체로는 아무 시점도 갖지 않는다.
몽타주가 객관적인 이미지를 산출하는 데 반해 롱 테이크는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하며 단지 주관적인 채로 남는다. 다시 말해 롱 테이크에는 영화적 표상 특유의 “현실 효과”가 그 기초에서 흔들리고 비틀거린다.
영화적 표상의 객관성이 획득되는 것은, 일련의 시점 숏들이 봉합되어 그 결과 그 모든 상이한 시점들이 어떻게든 통합된, 객관적 현실이 될 때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시점으로도 귀속될 수 없는 몇 숏[귀속불가능한 숏: 그 어떤 특수한 인물과도 관련되지 않는 공간으로부터 촬영된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화에서 객관적인 숏이란 없기 때문이다. 영화적 객관성은 여하한 객관적 숏도 없이 구축되는 것이다.
콥젝의 논점은, 파솔리니가 확립하고자 하는 몽타주와 롱 테이크의 구분이 일련의 상호 연결된 시점 숏과 연장된 주관적 숏의 구분으로 귀착된다는 요약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파솔리니가 몽타주와 연관시키는 객관성은 오로지 시점 숏만으로 구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귀속불가능한 숏도 얼마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콥젝은 파솔리니가 비판하는 자프루더의 암살 필름과 파솔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을 비교한다. 그는 영화 <살로>의 시퀀스가 그 에세이에서 자프루더 영화가 하는 역할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고 제안한다.
*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 줄거리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사드 후작의 소설 <소돔의 120일>을 원작으로 한다.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한 후 남은 파시스트들은 북부의 마을 살로에 모여 망명 정권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Repubblica Sociale Italiana, RSI 흔히 살로 공화국이라 한다)’을 형성하고 있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의 권력자인 대통령, 로마가톨릭교회 대주교, 최고판사, 공작 네 명은 자신들의 쾌락을 목적해 시읍면의 조례를 새롭게 제정한다. 그 규정에 따라서 미소년과 미소녀를 납치하거나 자원하는 사람을 모아서 그중에서 엄선한 남녀 각각 9명을 ‘비밀의 관’에 데려가게 된다. 권력자들은 거기서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음탕하고 변태 행위에 빠지게 된다. 매일 집회소에서 네 명의 이야기 노파들 중 한 명에게 외설스러운 체험을 이야기 하게 하고 그 이야기에 따라 소년들·소녀들을 상대로 그 이야기에 따라 실행에 옮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변태 행위는 감정이 강렬하고 갑작스러워 누르기 어려운 상태로 점점 진행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사망에 이르는 고문을 받게 되나 희생된 사람들과 똑같이 납치해 온 관 내의 소년 경비병들은 이런 희생된 사람들을 거들떠 보기는커녕 라디오 음악에 맞춰 춤춘다. (출처: 위키백과)
파솔리니의 에세이에서 그는 자프루더의 ‘외관상으로는 익명적이지만 / 실제로는 고도로 주관적인 시선’에 집중했다. <살로>의 시퀀스에서 세 명의 구경꾼들이 보는 이미지 역시 주관적인 것이다. 또한 파솔리니가 언급한 암살 이미지의 강력한 현존도 <살로>에서 나타나는 숨 막힐 듯한 근접성과 유사하다.
그런데 <살로>의 시퀀스에서 일어나는 것은 ‘도착증’의 행위들이기에 자프루더 영화에서 일어나는 것과의 사이에서 그 유사성들을 얼마나 고려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여기서 콥젝은 ‘도착증’에 대한 용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는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라캉은 <칸트를 사드와 더불어>에서 ‘사디즘’이라는 ‘도착증’을 전-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개인적인 병리로서가 아니라 칸트가 기술하는 근대 주체와 세계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질서와 수준에 있는 어떤 유형의 관계로서 고려한다.
칸트는 근대 주체를 세계와 어긋나 있는 것으로, 즉 법과 제도에 구조적으로 반항하는 것으로 보는데, ‘칸트적 주체에게 열려있는 반란의 가능성’과 ‘도착증자를 짓누르는 반란의 의무’는 구분해야 한다. 사드의 반항 행위는 법을 분쇄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법이 올바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려는, 즉 그를 처벌하도록 하려는 수단이다.
콥젝은 도착증이라는 용어를 문명화된 성적 도덕의 법을 침해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아마도 대타자가
사르트르(1905~1980)의 텍스트[<존재와 무>]에는 ‘응시’의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상술 뒤에 ‘사디즘에서 응시의 기능에 대한 성찰’이 등장한다.
라캉이 그에게서 빌려온 장면은 다음과 같다. 열쇠 구멍을 통해 엿보는 어떤 관음자는 그 자신의 바라보는 행위에 몰입되어 있다가 그의 뒤에서 들리는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고요함에 뒤이은 발자국 소리에 돌연 놀란다.
이 지점에서 “관음자의 시선”은 “그를 ‘대상’으로, ‘상처 받을 수 있는 신체’로 전락시키는 응시”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 응시란 무엇인가? 나는 내가 응시와 만나기에 타자들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응시에 이러한 ‘객관성의 보증자’라는 역할을 귀속시킬 때 그가 말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분명히 하지만, 영화 이론은 사르트르가 경계했던 바로 그 방식, ‘응시는 나의 경험의 통일적인 혹은 규제적인 범주인 것’으로 응시를 이해하기로 결정해 버린다.
사르트르의 ‘응시가 초재적’이라는 말은 “오로지 나의 세계 안에서만 만나지만, 나의 세계의 여하한 대상에도 부착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응시는 나의 세계의 내재적 일부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어느 곳에 실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세계 내의 잉여 대상’으로서의 응시에 걸려 넘어진다. 라캉이 사르트르를 해석하면서 “실패한 조우”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 말이다.
이 조우는, 우리가 대타자에 대해 공허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해준다.
관찰하는 주체와 응시의 대타자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상호성이 존재하지 않고, 다시 말해 응시의 대타자는 감지될 수 없다.
대타자가 응시와 만나는 것은 감성적 지표를 통해서이고, 내가 체화된 주체인 한에서이다. 발자국 소리를 듣자마자 관음자가 돌아보고서 그를 보고 있는 누군가를 포착한다면 그가 직면하는 것은 ‘응시’가 아니라 단지 ‘특수한 관찰자의 눈’일 따름이다.
사르트르는 “대타자는 아마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마도는 대타자의 존재 가능성이 아니라 그 존재의 양상을 기술한다. 대타자는 우연히, 만남의 우연성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타자는 인지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대타자가 있다는 것, 나의 존재에 대한 (무언가) 의식이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응시에서 대한 경험에서 만나는 타자는 “선-수량적”이다.
응시는 나의 지각에 객관성의 도장을 찍지만 이 날인은 단지 무언가 타자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보증할 뿐이며, 내가 보는 그 무엇이 내 시점 바깥에 있는 현실에 대한 적절한 표상임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라캉의 말처럼, 조우는 항상 빗나간 조우다.
그리고 이 객관성의 날인, 즉 ‘타자들 그 자체의 현존’의 의미는 인지의 계기에서가 아니라 관찰자의 신체를 뒤덮는 ‘수치심’의 느낌에서 출현한다.
프로이트에게서 가져온 라캉의 구분에 따르면, 수치심은 “대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보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이게 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구분에 따르면 수치심은 “대상화된 대타자(규정된 개인이거나 헤아릴 수 있는 수의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대타자[선-수량적인 대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서 생겨난다.
프로이트 역시 “낯선 대상을 매개로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를 “낯선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와 구분한다.
수치심의 느낌[타자들 그 자체에게 보여진다는 느낌]을 야기하는 것은 충동의 과도한 쾌락 속에서 “자신을 보는 행위”이다.
사르트르는 수치심이 우리가 ‘상처 받을 수 있는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하지만, 죽음을 앞둔 안티고네(<안티고네>)와 볼로냐 출신 학생의 사례(<베르 앙텔므, 인간 종>)에서 분명한 것은 수치심이 ‘견딜 수 없는 고통, 즉 의식이 소유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수 있는’ 신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 니오베
임박한 죽음의 위협에 대해 한탄하며 안티고네는 자신을 신화적인 인물인 니오베에 비유한다.
가련하게 죽은 탄탈로스의 따님 이야기를
그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바위가 담쟁이덩굴처럼 달라붙어
그녀의 몸은 돌덩이로 변했고
눈과 비는 끊임없이 그녀를 덮쳤다죠.
그녀 눈물 마를 날 없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바위를 적셨다죠.
죽음의 길로 가는 나의 삶.
니오베와 다를 바 없구나.
(출처: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김종환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114쪽)
니오베(Niobe)는 탄탈로스의 딸이다.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겸손함이 없었던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모든 것을 뽐내고 다녔다. 여신 레토는 훌륭한 자식을 2명(아폴론과 아르테미스)밖에 낳지 못했지만, 자신은 훌륭한 자식을 14명(아들 7명, 딸 7명)이나 낳았다고 뽐내고 다녔다. 이에 진노한 레토 여신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에게 오만한 니오베에게 벌을 내리라고 말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각각 그녀의 아들 7명과 딸 7명을 모두 활로 쏘아 몰살시켰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남편 암피온은 자살하였고, 니오베는 계속 한 곳에서 흐느끼다 바위로 변해 버리는 벌을 받았다. (출처: 위키백과)
불안과 응시
사르트르는 ‘<응시와의 조우>에 수반되는 정서’를 가리켜 ‘순수 경고 정서’라고 부른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불안’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불안과 응시의 관계는 무엇인가.
<죽은 아버지 법과 그 아들들의 관계에 관한 기술>(아버지는 죽었지만 그의 법은 살아남았다.)과 <관음증자의 응시에 관한 사르트르의 기술> 사이의 유사성은 다음과 같다.
대타자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법의 필연성과 그의 응시의 실재는 그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죽은 아버지의 법은 세계에 대해 내재적이지도 않고, 초재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와 그의 법을 살아있는 구체적인 그의 대표자들(세속적 아버지, 판사, 경찰 등) 속에서 비스듬하게 만난다.
대표자가 창조자와 합체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징적 법에 균열을 내고, 결국 그 법을 위반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항상 배후에서 다가오는 법에 말을 거는가? 하는 물음은, 응시가 항상 예기치 않게 환영같이 등장하는 근대 공적 영역의 출현이 제기하는 물음들과 동일하다. 청중이 더 이상 우리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도처에 있고, 아무 데도 없는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공적 무대에 서는가?
근대성에서 확립된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영역인 “공공성”은 “연극성”을 위협했고, 연극성은 결국 “몰입” 기법에 의해 밀려났다. 몰입 기법은 소설을 청중 자체와 절연시킨 것이 아니라 ‘연극 공연 앞에 위치했던 옛 유형의 청중’과 절연시켰다. 소설은 여전히 청중, 공중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그 공중은 비규정된 공중이었다.
절대적으로 대타자가
신경증에서의 분열된 주체의 이율배반적인 구조는 도착증에서의 의식의 분열과 완전히 다르다.
신경증은 주체가 무의식적 욕망과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충돌하면서 생기는 증상으로, 신경증적 주체는 욕망하지만 동시에 욕망을 두려워하고 금지하는 이중 구조에 빠진다.
도착자는 자신의 금기된 욕망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 ‘나는 이게 금지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라고 의식적 인식을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것이 금지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라고 함으로써 앎과 믿음 사이가 분열되는 것이다. 즉 도착자는 항상 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법을 매우 잘 알고 있고, 심지어 법이 있어야 자기 쾌락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디스트의 궁극적인 목표는, 타자가 자신이 이제껏 받아왔던 고통을 더 이상 넘어서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 대신 그 속에 빠져들기로 결심하게 하는 것이다. 사디스트의 쾌락의 원천은 타자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고통의 외설적인, 활용 불가능한 사실성과 동일시하겠다고 자유롭게 결단을 내리는 것에 있다.
이 논점은 이렇게 재진술될 수 있다. 응시와의 조우 속에서, 나에게 현시되는 대타자는 현행적인, 속세 속의 현존으로 환원되지도 않고, 완전히 비워져서 초재적인 가능성의 조건이 되지도 않는다.
반면, 사디즘에서의 고문의 노력은 대타자가 현실적인 사람이자 동시에 초재적인 가능성의 조건이 되도록 몰고 가는 데 바쳐진다. 사디스트는 살로 자유를 포획하고 싶어 한다. 사디스트는 응시를 규정된 개인, 피와 살을 가진 개인에게 부착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신경증자는 대타자의 욕망을 확신하지 못하고, 특수한 법에 충실할지를 놓고 결국 주저하게 된다. 그는 그 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약간 모호하게 여긴다.
반면, 도착증자가 법에 대해 맺는 관계에는 그런 모호함이나 주저함이 없다. 도착증자의 대타자는 자의적이고, 상대적이며 동시에 절대적인 힘을 가진 법이다. (사드에게 장모인 몽트뢰이유 부인은 법 그 자체였다.) 도착증자는 이 법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한다. 그가 타자들과 맺는 관계는 상징적인 결속의 성격보다는 계약의 성격을 갖는다. 계약은 사태를 분명히 나타내며 애매함을 제거한다. 계약 협정은 항상 상징적 법보다 더 엄격하고 경직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트는 이런 ‘경직성’이 도착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도착증자는 자신의 향유 권리를, 그가 실행하기로 계약한 의무로서 떠맡기 위해 포기한다. 향유는 그가 대타자를 위해 수행하는 봉사가 된다.
칸트는 겁쟁이의 삶은 의미 없는 삶이라고 가르쳤다. 어떤 지점에서 우리는 대타자의 욕망에 대한 ‘신경증적 망설임’을 그만두고 우리 자신의 도덕법칙에 따라야 한다. 사드의 무자비한 장모는 칸트의 분열된 주체에게 자신의 주저함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그 정언명령의 ‘기괴한 희화화들’이다.
파솔리니의 <살로>는 그 도덕적 명령에 대한 ‘도착’을 폭로하려는 시도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숏들이 번갈아 교차하는 추적 몽타주이지만 그 이후로는 극도로 긴 롱 테이크가 된다. 컷은 최소화되어 있다. 이 도착증적 세계에서 우리는 단지 확실함의 상태와 전시만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네 명의 난봉꾼-집행자는 ‘가장 아름다운 엉덩이 경연 대회’라고 부르는 것을 고안해낸다. 이들은 단지 하나의 비천한 신체 부위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아름다움의 이상이라는 개념을 조롱한다.
그들의 이 근본적인 판단 행위는 이 하나의 엉덩이를 등가 관계(모든 것은 교환될 수 있다)로부터 떼어낸다. 이 하나의 엉덩이는 순수 사용의 대상이 되어, 희생자들을 무한히, 무제약적으로 고문하는 일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신경증자는 대타자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규정된 공중에게 노출된 채로 있는 반면에 / 도착증자는 대타자와 대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르트르는 도착증자는 대타자를 고문에 복종시킨다고 말하고, 라캉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라캉은 도착증자가 대타자의 하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도착증자와 대타자의 관계’라는 문제에서 ‘의식의 분열’이라는 개념을 다시 만난다. 도착증자는 대타자를 숭배하는 하인이자 동시에 대타자를 고문하는 자이다.
도착증자 자신의 행동, 즉 그가 부과하는 고문은 / 주체화될 수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 대타자의 불가피한 의지가 도착증자에게 부과된 것으로 경험된다. 이 해석은 어떤 일부가 여전히 의식적인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주체화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착증자는 대타자의 의지의 순수 도구, 즉 정념-없는 도구이다. 도착증자가 현행의, 오류 없는, 법의 실례들을 찾아나서는 목적은 법을 모욕하거나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틀릴 수 있는 법을 내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법을 위반하고 자기 자신의 자율적인 법으로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법을 더 잘 숭배하기 위해서이다. 법에서 살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자크-알랭 밀레의 주장처럼, 최악의 도착증자는 가장 정직한 자, 자신을 단지 법의 도구로 보는 야만적인 도덕주의자이다. 사드의 도덕주의적 슬로건은 ‘당신이 공화주의자라면 한 번 더 노력하라!’였다.
* 당신이 공화주의자라면 한 번 더 노력하라! (사드)
공화주의자는 기존 왕정이나 교회 권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도덕, 종교 같은 것들에 얽매여 있다. 진정한 공화주의자가 되고 싶으면, 기존 도덕을 깨끗이 폐기하고 철저히 무신론적이고, 쾌락주의적이고, 비도덕적인 급진성[성적 쾌락주의]을 가져야 한다.
파솔리니의 말처럼 하나의 주관적 롱 테이크인 [케네디 암살 필름]은 “극단적인 행위 언어”, 다시 말해 도착증 일반의 언어처럼 상징적인 것을 기호들로 대체하려고 하는 “비상징적 기호들”(피, 총알, 쓰러짐...)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눈과 응시 사이의 틈새가 사라져버렸기에, 상징을 만들 수 없고, 공적 의례는 사적인 홈 무비로 바뀌었다.
파솔리니는 자프루더를 그저 역사의 하인으로, 목격하는 사건을 포착하는 앵글을 선택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정치적인 통찰의 방향(파솔리니는 미국 제일의 법적 권위자의 살해를, 법에 대한 도착증적 관계를 일별했는가)으로 움직여간다.
콥젝의 말. 그[파솔리니]는 한 미국 대통령과 그의 부인이 어떤 냉담한 특별 검사에게 추적당할 때를 예견했던 것 같다. 이 검사를 최악의 도착증의 한 사례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건 그에게 욕망의 어떤 메마름이 있기 때문에, 그가 법을 정화시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자들은 권력의 중심을 도덕적이고 성적으로 정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는 법과 도덕의 광기가 도착증적 형태(욕망의 메마름, 강박적으로 정화)로 존재한다.
* 나는 아직 "2부 악과 관람자의 눈 - 8. 자프루더가 본 것" 밖에 제대로 읽지 못했다.
* 정말 어렵다. 하하하하하. (실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