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Nozick(로버트 노직), Anarchy, State and Utopia(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
내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경험 이외에 중요한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물음도 상당한 퍼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면 어떤 경험이든 줄 수 있는 경험 기계가 있다고 해보자. 최고의 신경심리학자들이 내 뇌를 자극해서 내가 위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거나 친구를 사귀고 있다거나 또는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동안 내내 나는 두뇌에 전극을 꽂고 탱크 안에 떠 있다. 내 일생의 경험을 미리 프로그래밍해서 이 기계안에 들어가서 일생을 보낼 것인가? 물론 내가 탱크 안에 있는 동안에는 나는 내가 거기 있는 것을 모른다. 나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기계에 들어가겠는가?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어떻게 느껴지는가 말고 우리에게 중요한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의 경험 이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어떤 것들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저 그것을 하는 경험을 갖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어떤 경험들의 경우에, 우리가 그것들을 하는 경험, 또는 그것들을 해냈다고 생각하는 경험을 갖고 싶어하는 이유는 오직 우리가 그 행동들을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기계에 들어가지 않는 두번째 이유는 우리가 어떤 식이고 싶어한다는 것, 어떤 종류의 사람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탱크 안에 떠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부정형의 덩어리일 뿐이다. 오랫동안 탱크 안에 있던 사람에게는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용감한가, 친절한가, 똑똑한가, 재치있는가, 사랑하는가? 말하기 어렵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그 어떤 사람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기계에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자살이다. 이 기계에 매혹된 어떤 이들은 우리의 경험에 반영되는 것 이외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셋째로, 경험 기계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를 인조의 현실,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것보다 더 심오할 수도 없고 더 중요할 수도 없는 세계에 우리를 한정시킨다. 더 깊은 어떤 실재와의 어떤 실제의 만남도 있을 수 없다. 비록 그런 경험은 시뮬레이트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만남의 가능성, 더 심오한 의미를 간파할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한다.
경험 기계를 상상해보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경험 이외에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일상생활에선 보통 그냥 하는 것을 원해서, 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이 아주 뚜렷하게 구별되는 경험도 있다.
예) 실종된 아이를 찾는 것, 실종된 아이를 찾는 경험을 하는 것.
범죄자를 잡는 것, 범죄자를 잡는 경험을 하는 것.
불치병이 낫는 것, 불치병이 낫는 경험을 하는 것.
진짜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은 기계 안에서도 불가능하다.
예) 통일장 이론을 완성한 척을 할 수는 있다.
감명깊은 시를 쓴 걸로 쳐 줄 수는 있다.
reality에서는...
이순신 혈액형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 모른다.
더 자세히 묻는 것은 의미가 있다.
가상현실에서는...
홍길동 혈액형은? 없다.
디테일을 줄수록 현실감이 들지만, 가상은 어느 단계에 가면 더 묻는 것이 의미 없는 벽이 있다.
가상 현실은 영화 세트장 같은 것이다.